三國志 > 魏書 東夷傳 > 夫餘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국토 면적은]사방 2천 리가 되며, 호수는 8만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궁실과 창고 및 감옥을 가지고 있다. 산릉과 넓은 들이 많아서 동이지역에서는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토질은 오곡이 자라기에는 적당하지만, 오과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나라에는 君王이 있고, 모두 육축의 이름으로 官名을 정하여 馬加·牛加·豬加·狗加 大使·大使者·使者가 있다. 부락에는 호민이 있으며, 하호라 불리는 백성은 모두 노복이 되었다. 諸加들은 별도로 四出道를 주관하는데, 큰 곳은 수천家이며 작은 곳은 수백家였다.
夫餘傳 : 『三國志』夫餘傳은 총 930字이며, 中國正史 중 夫餘에 관한 최초의 列傳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은 夫餘의 位置와 강역을 비롯하여 관제·의식·풍속·산물등 夫餘의 생활습속에 관한 상세한 상태기술과 현토군·후한·공손씨등 中國의 諸 세력과의 관계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문헌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사의 1/3 정도가『위략』기사와 관련된 것인데, 선자인 진수가 참고한『위략』은 배송지 注에 인용된『魏略』과는 다른 이본이나, 원위략에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며,『위략』의 夫餘와 高句麗 공통의 습속기사는 생략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三國志』夫餘傳은 종래의 과대한 평가와는 달리 전체적으로는 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魏略』이 멸실된 현재『三國志』夫餘傳은 배송지에 인용된『魏略』기사와 함께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史書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夫餘 : 여기서의 夫餘는 北夫餘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北夫餘는 韓國史에서 古朝鮮 다음으로 등장하는 국가로 중국문헌에는 夫餘로, 국내문헌에는 扶餘로 표기되고 있다.
① 夫餘란 명칭은 (神明)에서 유래하여 開發->滋蔓->平野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로 변하였다는 說과(崔南善), 『資治通鑑』에 나오는 ‘初夫餘居于鹿山’의 鹿山과 만주어에서 사슴(鹿)을 Puhu, 몽고어에서 Pobgo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夫餘를 사슴의 뜻이라고 하는 說이 있는데 ‘벌’에서 유래되었다는 說이 유력하다.
현재로서는 그 어원의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平野를 의미하는 夫里 등과 同音同義語로 夫餘의 국가적 위치와 관련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山海經』의 ‘有胡不與之國’과 관련하여 濊의 漢音 ‘후이’에서 夫餘의 명칭이 기원했다는 說도 있으나
이는 아직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② 夫餘는 일찍부터 中國文獻에 등장하는데, 前記한『山海經』의 기사를 제외하더라도 복생의『尙書大典』에는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 이라 하고,『史記』「貨殖傳」에는 ‘夫燕 …… 北隣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眞番之利’ 라 하였으며,『漢書』「地理志」에도 ‘北隙烏丸·夫餘 東賈眞番之利’ 라는 기사가 보인다.
따라서 夫餘는 이미 先秦時代부터 古朝鮮과 더불어 중국에 알려질 정도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늦어도 1세기 초의 後漢代에는 王號를 쓰는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보인다.
③ 이와 같은 夫餘는 貊族이 古朝鮮 즉, 濊人의 나라에 건국한 국가란 說과(濊의 일부가 貊에 흡수되어 만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濊貊族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說이 있다
長城之北 去玄菟千里 : 長城은 中國 北方에 外敵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城壁으로 흔히 萬里長城이라 불리운다. 地圖상의 연장은 약 2,700km이지만, 기복이 있거나 중첩된 부분을 고려한다면 5,000km에 달한다.
長城의 기원은 春秋時代의 齊에서 시작되어 戰國時代에 들어오면 楚·魏·燕·趙·秦 등 中原의 諸國이 모두 국경에 이를 세웠다. B.C. 221年 秦의 始皇帝가 統一한 후 匈奴를 방어하기 위하여 이를 보수하여 臨洮에서 遼東에 이르는 萬里의 長城을 수축하였다. 최근에 발견된 赤峰 등지의 유적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長城은 현재보다는 北方에 위치하였다. 南北朝시대에 이르러 大同에서 居庸關을 거쳐 山海關 부근에 이르는 長城을 수축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內長城이다. 당시의 長城은 판축과 석축을 겸용한 것으로 주로 北方 유목민족의 기마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것에 주 목적이 있었다. 現代의 長城과 같은 웅대한 규모가 갖추어진 것은 明代에 이르러서이며, 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잃고 중국본토와 몽고를 구별하는 정치적 경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本傳의 長城은 현재의 萬里長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燕·秦시대에 쌓은 長城을 의미하는 것으로, 1975년 이후 中共에서 발굴된 당시 長城의 東端은 대체로 遼河 本流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3차 玄菟郡治인 撫順지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三國志』의 ‘長城之北 去玄菟千里’와『後漢書』의 ‘在玄菟北千里’는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北有弱水 : 弱水의 명칭은『尙書』「禹貢篇」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弱水는 夫餘의 위치비정과 관련되어 중요한 문제인데, 『通典』에는 ‘營州柳城縣東南有饒樂水 即弱水也’라 하였다.
현재에는 黑龍江이라는 說과, 弱의 옛 발음이 nziak 혹은 niak이므로 弱水는 松花江의 지류인 嫩江(Nonni강)을 가리킨다는 說이 있다.
그러나『晋書』肅愼傳의 ‘北極弱手’라는 史料에 유의한다면 黑龍江이 보다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1. 『三國志』夫餘傳
夫餘
여기서의 夫餘는 北夫餘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北夫餘는 韓國史에서 古朝鮮 다음으로 등장하는 국가로 中國文獻에는 夫餘로, 國內文獻에는 扶餘로 표기되고 있다.
① 夫餘란 명칭은 (神明)에서 유래하여 開發->滋蔓->平野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로 변하였다는 說과(崔南善,『兒時朝鮮』p.158), 『資治通鑑』에 나오는 ‘初夫餘居于鹿山’의 鹿山과 만주어에서 사슴(鹿)을 Puhu, 몽고어에서 Pobgo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夫餘를 사슴의 뜻이라고 하는 說이 있는데, ‘벌’에서 유래되었다는 說이 유력하다.
현재로서는 그 어원의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平野를 의미하는 夫里 등과 同音同義語로 夫餘의 국가적 위치와 관련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山海經』의 ‘有胡不與之國’과 관련하여 濊의 漢音 ‘후이’에서 夫餘의 명칭이 기원했다는 說도 있다, 이는 아직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② 夫餘는 일찍부터 中國文獻에 등장하는데, 前記한『山海經』의 기사를 제외하더라도 伏生의『尙書大典』에는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 이라 하고,『史記』「貨殖傳」에는 ‘夫燕 …… 北隣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眞番之利’ 라 하였으며,『漢書』「地理志」에도 ‘北隙烏丸·夫餘 東賈眞番之利’ 라는 기사가 보인다.
따라서 夫餘는 이미 先秦時代부터 古朝鮮과 더불어 중국에 알려질 정도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③ 이와 같은 夫餘는 貊族이 古朝鮮 즉, 濊人의 나라에 건국한 국가란 설과 濊의 일부가 貊에 흡수되어 만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濊貊族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說이 있다.
2.『晋書』肅愼傳
北極弱水
『後漢書』와 『三國志』를 보면 ‘夫餘 …… 北有弱水’라 하여 夫餘의 북쪽 경계가 弱水에 닿았다고 하고 있으며, 『晋書』숙신지전에서도 숙신의 북쪽 경계가 弱水에 接한다고 밝히고 있다. 숙신이 동쪽으로 오츠크 바다에 접해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弱水는 오늘날 Amur江이 틀림없다. 그러나 숙신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夫餘의 북쪽경계가 弱水에 接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松花江을 가리키는 것 같다.
方可二千里 : 『後漢書』에는 ‘地方二千里’라 하였으며, 대체적인 夫餘의 영역을 말한다. 각종 史書에 나오는 기록을 토대로 夫餘의 영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西境: 夫餘는 서쪽으로 B.C. 3세기 말~1세기에는 오환과, 그 이후 시기(B.C. 1~5세기)에는 선빅와 각각 접하고 있었다. 『漢書』「地理志」에 의하면 燕이 ‘北隙烏丸·夫餘’라 하였으니, 烏丸과 부여가 燕나라 北쪽에서 서로 접하고 있었으며, 부여의 서쪽에 烏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後漢書』「오환·선비전」에 의하면 기원전 3세기 말~2세기 초에 오환이 흉노에게 정복당한 후에도 오환은 본래 거주지역에 그대로 있었으므로 夫餘와 오환과의 지리적 관계는 기원 1세기까지도 그 전시기와 다름이 없었다.
기원 1세기에 夫餘의 서쪽에 선비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기원 1세기 말~2세기 초 後漢이 흉노를 격파한 후 급속히 장성한 선비족들은 이전 흉노의 지역을 차지하게 되어 夫餘와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夫餘의 西邊은 西遼河 일대였다. 즉, 기원 2세기 중엽 鮮卑의 右肩이었던 檀石槐는 匈奴 故地를 차지하고 그 관할구역을 東部·中部·西部의 3개부로 구분하였는데, 동부지역은 右北平으로부터 遼東에 이르러 夫餘·濊貊과 접하였다.
3세기 전반 軻比能 代의 鮮卑의 東쪽 변경은 遼水界線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三國志』「烏丸·鮮卑傳」) 기원2~3세기의 遼水는 오늘의 遼河이며, 이 시기의 遼東도 遼河 동쪽지역이다. 그런데 당시 遼河 下流에는 後漢과 魏의 遼東郡·玄菟郡 등이 있었으므로 鮮卑의 동쪽은 遼河 上流지역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鮮卑와 접하는 夫餘의 西邊도 西遼河 일대라고 할 수 있다.
② 東境: 夫餘의 동쪽은 挹婁와 접하였다고 하는데, 『晋書』「東夷列傳」에 의하면 挹婁의 후신인 肅愼이 부여에서 60일이면 갈 수 있다고 하여, 夫餘 中心部로부터 대략 1,000리의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의 읍루는 夫餘에 예속되어 있었던 까닭에 실지 夫餘의 영역은 읍루의 東邊인 연해주 일대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
③ 北境: ‘北有弱水’라 하여 後漢代의 夫餘의 북쪽 강역은 弱水임이 분명하나, 弱水의 위치에 대하여는 諸說이 분분하다. 그런데『晋書』肅愼傳에 의하면 ‘肅愼北極弱水’라 하여 弱水라는 강은 夫餘 뿐 아니라 挹婁(肅愼)의 북쪽까지도 경유하면서 흐르는 큰 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화강 유역에 있었던 夫餘와 그 동변이 연해주의 해변지대까지 이르렀던 읍루의 북쪽을 경유하여 흐르는 큰 강으로는 黑龍江 외에는 없다. 따라서 夫餘의 北境은 흑룡강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④ 南境: 南쪽은 대체로 高句麗와 접하였다. 晋代에 이르러서는 鮮卑 慕容氏의 진출로 鮮卑와 접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부여의 지역이 사방 2,000리였다는 것은 부여가 오늘의 夫餘府 일대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연해주 지방, 북쪽으로는 흑룡강 이남, 서쪽으로는 遼河 下流, 남쪽으로는 백두산 줄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戶八萬 : '戶八萬'이란 기록은 앞에 나타나는 ‘夫餘 …… 南與高句麗’ 란 기록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夫餘 建國當時의 數로 볼 수는 없으며, 高句麗의 興起와 제 2차 玄菟郡의 設置 時期인 B.C. 82年 이후부터 A.D. 2年 사이의 人口로 보여진다.『漢書』「地理志」에서 玄菟郡이 있는 幽州管內 諸郡의 戶口數를 비교해 보면 一戶當 口數의 총평균은 4.6이 된다. 또『後漢書』「郡國志」에서 幽州管內 諸郡의 戶口數를 비교해 보면 一戶當 口數의 총평균은 5.38이 되므로 A.D. 2年의 夫餘의 人口數는 36萬 8千~39萬 2千에 해당된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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